같은 슬픔으로 마주보고 선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올댓아트 박송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9.12.09 14:48

■ 고스트 가이드 GHOST GUIDE |2019.12.05~2020.01.23 |THE PAGE GALLERY

전시전경 |페이지갤러리

1976년부터 1983년 사이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의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됐다. 희생된 사람들 중 일부는 아르헨티나 남쪽 바다에 던져졌다. 다시 찾을 수 없는 그들은 실종자가 됐고 그들을 찾지 못한 유가족들의 삶은 그 시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 법의학자는 유가족들 곁에서 실종자를 찾아 유전자 감식으로 그들의 죽음을 확인한다. 그는 ‘상실’과 ‘실종’은 다르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상실’에는 확신이 있지만, ‘실종’에는 확신이 없다는 것. 그는 그 확신이 없을 때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인생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좋은 빛 좋은 공기’ |페이지갤러리

아르헨티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임흥순 감독의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서로 닮은 두 도시의 슬픔을 담은 작품이다. ‘좋은 빛’은 광주의 도시명을 풀이한 것이고, ‘좋은 공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담겨 있는 뜻이라고 한다. 임 감독은 “아르헨티나의 실종자 문제는 심각하다. 놀랍게도 광주도 실종자를 지금까지 한 명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임흥순 감독|페이지갤러리

영화 <위로공단> <비념> 등 역사적인 사건에서 개인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업들을 주로 해온 임흥순 감독의 개인전 <고스트 가이드GHOST GUIDE>가 서울 더 페이지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40여년 전 참혹한 학살을 겪은 두 도시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시명인 ‘고스트 가이드’는 이번 전시에 설치된 작품명이기도 하면서 이번 전시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고스트 가이드는 사라진 사람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확인해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법의학자 같은 사람일수도 있다. 임흥순 감독은 “죽은 자를 찾고 잘 보내고 안내하는 것을 생각하니 ‘귀신을 안내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자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발굴하고 조사하고 찾는 일을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전시전경|페이지갤러리

또 한편으로는 ‘고스트 가이드’는 여전히 그 시간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지난 기억 속에서 유령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청해 듣는 감독 자신일 수도 있다. 임 감독은 최근의 작업을 하면서 꿈을 많이 꾸게 됐다고 전했다. “5.18유적지, 국군통합병원, 옛 전남도청, 상무대 등을 계속 찾아다니다보니 꿈 속에서 장소들과 과련된 폐허의 공터가 자주 나왔다. 빈 공간에 죽은 자들이 들어오고 안내해주는 사람도 있고 그 뒤를 학생들이 따라들어오고...그런 꿈들을 꾸면서 애도를 할 수 있는 미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친해하는 지구Dear earth|페이지갤러리

<친애하는 지구 Dear earth>는 VR영상과 돌, 흙, 조각 등의 전시로 이루어져 있다. 갤러리 벽면에는 아르헨티나 사진과 광주의 사진들이 마주보고 전시돼 있다. 학살의 장소들, 사건을 기억할만한 단서들이 사진으로 남겨져 있다. 한 가운데에는 임 감독이 수집해놓은 돌들이 전시돼 있다. 희생자들이 사라졌을 법한 장소들, 예를 들면 ESMA 병원건물(아르헨티나 군사정권시기 국가폭력과 납치, 감금 고문의 장소)의 잔해들을 수집해 왔다.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흙, 조각, 건물 잔해 등을 통해서 희생자들의 심정이나 상황들을 조금이라도 기억해나가고 찾아가겠단는 생각에서다. 임 감독은 “가는 곳마다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다. 전시를 염두에 두고 모은 건 아니고, 뭘 할 수 있을까, 이거라도 갖고 있으면 기억하면서 고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모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스트 가이드 Ghost Guide|페이지갤러리

전시명과 동명의 작품인 <고스트 가이드 Ghost Guide>에서는 비닐봉지, 천, 나무 등 혼합재료를 활용한 스크린을 설치해 8채널 영상을 상영한다. 영상 중에는 광주의 청소년들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청소년들이 그날을 떠올리며 만든 영상들이 담겨져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청소년들은 고문의 기억을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동작으로 구현하기도 하고 광주의 청소년들은 그날의 스러진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기도 했다. 이 작업은 각 도시의 청소년들이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지만 같이 할수 있는 작업을 모색하다가 광주의 청소년들이 영상을 찍어 보내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영상을 편집해 집어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좋은 빛, 좋은 공기|페이지갤러리

42분짜리 영상인 <좋은 빛, 좋은 공기>는 두 개의 스크린이 마주본 가운데 한 쪽에서는 광주의 이야기가 다른 한쪽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했다. 광주의 스크린에서 인터뷰가 흘러나오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스크린은 수심 깊은 검은 바다를 보여준다. 그 날을 기억하며 채 말을 잊지 못하는 희생자 가족의 목소리는 아르헨티나의 희생자가 수장됐을 검은 바다의 슬픔과 맞물린다. 학살의 장소들이 보존되고 기억되지 않고 사라지고 있지만, 작은 것 하나에서라도 기억과 애도를 이어가고 있는 이번 전시는 아직 해야 할일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임흥순, 고스트가이드
2019.12.05~2020.1.23
더 페이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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