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본 투자자 패닉…"누굴 믿냐" 회사채펀드 1.7조 뺐다

머니투데이 김사무엘 기자 2022.10.21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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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 본 투자자 패닉…"누굴 믿냐" 회사채펀드 1.7조 뺐다


"레고랜드 사태로 수급이 완전 꼬여버렸습니다. 이러다 진짜 펀드런(대규모 환매사태) 일어날까 걱정이네요."

국내 한 자산운용사에서 채권 펀드를 운용하는 담당자는 최근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 펀드에서 자금 유출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회사채 시장 전반의 신용위험이 높아지면서 손실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환매가 이어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펀드 내 채권들 팔아야 하는 악순환이 생기면서 갈수록 수급이 꼬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레고랜드 사태를 전후로 최근 한 달 간 회사채 펀드에서는 급격한 자금 유출이 이어지고 있다.

20일 한국펀드평가에 따르면 지난 19일 기준 공·사모 회사채 펀드(회사채권, 일반채권, 하이일드채권, 채권혼합)의 설정액은 총 49조3639억원으로 최근 한 달 동안 1조7000억원 환매가 일어났다.



회사채 펀드에서 올들어 지속적으로 자금이 빠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최근 유출 속도는 더 빠르다. 올해 회사채 펀드의 총 자금 유출은 9조8291억원, 월평균으로는 약 1조원 가량이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회사채 펀드 내 자금 유출의 주요 원인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한 채권 수익률 악화였다. 금리가 오르고 회사채 스프레드(국채와 회사채 간 수익률 차이)가 점점 벌어지면서 채권 가격은 급격히 떨어졌다.

채권 직접투자는 만기까지 보유하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지만 펀드는 다르다. 보유자산의 가격 변동에 따라 기준가를 매일 산정하기 때문에 평가손익이 그대로 반영된다. 원금 보장도 안된다. 손실이 커질수록 환매가 늘어나는 이유다.


특히 최근에는 연 4~5% 이상 안정적으로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예·적금 상품이 나오면서 채권 펀드의 상대적 매력도 떨어졌다. 올해 채권 펀드에서 빠져나간 자금 상당수는 예·적금으로 옮겨갔다는 게 운용업계의 시각이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에는 자금 유출의 원인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수익률 저하 때문이었다면 최근에는 회사채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인한 펀드 환매 중단 우려가 투자자들의 공포심리를 자극한다.

강원중도개발공사가 레고랜드 테마파크 조성을 위해 빌린 2050억원 상당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은 지난달 28일 강원도가 채무상환을 거부하면서 기한이익 상실(EOD) 상태에 빠졌다. 부동산 시장이 급격히 냉각된 가운데 신용등급이 높은 공사채 마저 부도가 나면서 그 여파는 회사채 시장 전반으로 급격히 번졌다.

레고랜드뿐 아니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유동화한 ABCP의 신용위험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회사채와 기업어음(CP) 역시 시장에서 제대로 소화가 안 되긴 마찬가지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대규모 환매가 발생한 펀드가 대개 이런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주요 자산으로 담은 펀드다.

신용등급 'BBB+' 이상 채권과 'A3+' 이상 CP에 주로 투자하는 '한화코리아밸류채권 C-i'의 설정액은 올해 9월까지 꾸준히 1000억원 이상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달 들어서는 1305억원에서 현재 195억원으로 투자금 85%가 빠져나갔다.

이 펀드는 오프라인 창구에서 납입금액 5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판매한 상품이다. 회사채 시장의 신용경색 우려가 커지면서 자산가들이 대거 자금을 빼갔다는 분석이다.

같은 기간 1000억원 이상 환매가 발생한 'KB스타단기플러스' 역시 회사채, 단기채, CP 등에 투자한다. 가격 변동성이 작고 신용등급이 우수한 단기 회사채에 투자하는 상품임에도 대규모 자금 유출이 일어난다.

문제는 대규모 환매가 이어질수록 운용사는 고객들에게 돈을 돌려주기 위해 펀드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채권)을 팔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량채 매도가 쏟아지면서 채권 가격은 더 하락하고 펀드 손실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환매는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다.

국내 모 자산운용사의 펀드 마케팅 담당은 "이전까지 회사채 펀드에서 환매가 수익률 저하 때문이라면 이제는 펀드가 담고 있는 채권에서 디폴트가 발생하면서 혹시 환매 중단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채 시장의 주요 자금줄인 펀드에서의 자금 유출이 심화할수록 기업들의 신용경색 우려는 더 커진다. 시장 유동성이 줄어드는 국면에 투자심리 마저 크게 위축되면서 신용등급이 우량한 회사채마저도 시장의 외면을 받는다.

또 다른 자산운용사의 채권운용본부 팀장급 직원은 "고객들이 환매 중단이나 디폴트 걱정을 하지만 우량 회사채를 담은 펀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지금은 레고랜드 사태가 잘 마무리 되고 투자심리가 회복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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