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들이 투자계획을 축소하면서 지난 5월 주요 그룹들이 발표한 1000조원 규모 투자 방침이 주목된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사진=뉴스1
국내 주요 기업들이 투자계획을 축소하면서 지난 5월 주요 그룹들이 발표한 1000조원 규모 투자 방침이 주목된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사진=뉴스1

▶기사 게재 순서
① 기업 재고 늘고 수익성 급감… 산업계 '초비상'
② 끝 모를 불황터널… 내년이 더 어렵다
경기침체에 재계 '1000조 투자' 흔들
④ '퍼펙트 스톰' 경고음… 위기 넘을 해법은


글로벌 인플레이션 및 레고랜드발 채권시장 '돈맥경화'(자금흐름이 막힌 모습) 등 대내외 경영환경이 악화하자 국내 주요 기업들이 투자계획 축소에 나섰다. 유동성을 확보해 혹시 모를 위기 상황에 신속 대응하기 위한 의도로 관측된다. 지난 5월 주요 그룹들이 발표한 1000조원 규모의 투자 방침에도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룰 수 있으면 미루자… 투자 주머니 닫는 재계

현대자동차는 지난달 24일 열린 콘퍼런스콜을 통해 올해 투자계획을 9조2000억원에서 8조9000억원으로 하향 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대외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유동성 관리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설비투자액(CAPEX)이 5조원에서 3조9000억원으로 22% 줄었다. 시설 보수비를 뜻하는 경상 성격 투자비 절감이 반영된 영향으로 급하지 않은 보수는 뒤로 미루겠다는 의도다. 현대차는 연초 -5000억원에서 +1조원으로 예상했던 자동차 부문 잉여현금흐름(FCF)도 +3조원~+4조5000억원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는 현대차보다 사정이 급하다. 올해 3분기(7~9월) 영업이익(1조6556억원)이 전년 동기(4조1718억원) 대비 60% 넘게 줄어들면서 내년도 투자 규모를 올해(10조원대 후반)의 절반 수준으로 줄일 계획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전 세계적 거시경제 악화로 반도체 제품 수요 부진이 나타났고 그로 인해 제품값이 떨어지면서 영업이익이 크게 줄었다"며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돼 내년 투자 규모를 줄이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거시경제 악화는 석유화학·정유업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화솔루션은 내년까지 총 1600억원을 들여 질산 유도품(DNT) 생산공장을 짓기로 한 투자계획을 철회했다. 원자재 가격 급등 및 제반 물가 상승으로 투자비가 급증해 투자 경제성이 떨어져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원자재 수급 상황이 악화한 것도 주효했다. 한화솔루션은 석유화학 사업 대신 성장 가능성이 큰 태양광 사업에 힘을 줘 불확실한 경영환경을 헤쳐나갈 전망이다.

현대오일뱅크도 3600억원을 투자해 상압증류공정(CDU) 등을 신설한다는 내용의 투자계획을 중단했다. 2019년 5월 해당 설비투자를 결정한 후 지난해 9월까지 공사를 마무리 지을 방침이었으나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투자가 미뤄졌고 수익성 악화 등을 이유로 전면 백지화했다. 일각에서는 지난 7월 기업공개(IPO) 중단 발표로 대규모 자금조달에 차질이 생기면서 현금 확보 중요성이 강조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재계 공언 '1000조원' 투자 보따리, 축소 가능성은

그래픽은 기업별 투자계획 변동 현황. /그래픽=김은옥 기자
그래픽은 기업별 투자계획 변동 현황. /그래픽=김은옥 기자

국내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투자계획을 철회하면서 산업 경쟁력 강화 등을 위해 5년간 총 1000조원을 투자한다는 재계 방침도 어그러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금은 단기 투자를 수정하고 있지만 글로벌 경기침체가 길어지면 중장기 투자계획 수정도 불가피하다는 시각이다. 투자금액이 천문학적인 만큼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앞서 재계는 2026년까지 ▲삼성 450조원 ▲SK 247조원 ▲LG 106조원 ▲포스코 53조원 ▲GS 21조원 ▲현대중공업그룹 21조원 등을 투자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여론조사기관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대비 하반기 투자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답변이 28.0%에 달했다. 전경련은 일부 대기업은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대외환경이 불투명해 대기업 전체 투자 축소가 나타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고물가·고환율·고금리 현상 등 경영 불확실성에 직면한 기업이 투자를 늘리긴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기업들의 자금흐름 악화를 지적하며 기업들의 투자 환경이 녹록지 않다고 봤다. 김현수 대한상의 경제정책실장은 "고금리 추세가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돼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우려했고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잇따른 금리 인상으로 기업들은 투자위축을 넘어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대기업 관계자는 "경제 상황에 따라 투자 시기나 규모가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며 "지난 5월 각 기업이 발표한 투자계획은 중장기 계획이기 때문에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대부분 기업이 중장기 투자계획까지 축소하려는 것 같지는 않지만 경제 악화가 장기화되면 조정이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