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뉴시스

“미래 세대를 위해 사용후 핵연료의 안전한 관리에 필요한 고준위특별법의 신속한 제정을 촉구한다.”(손병복 울진군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시설 확보를 위해 특별법 제정이 절실하다.”(주낙영 경주시장)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할 때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 폐기물)를 저장할 영구처분장과 중간저장시설 건설 및 원전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 건설과 관련한 주민 지원 방안 등을 담은 특별법 통과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열린 ‘고준위특별법 대국민 심층토론회’ 참석자들은 정부 관계자, 지역 주민, 전문가들 할 것 없이 모두 한목소리로 특별법 통과를 촉구했다. 원전 내에 고준위 방폐물을 임시 저장하는 수조의 포화 시점이 2030년 전남 영광 한빛원전부터 2031년 경북 울진 한울원전, 2032년 부산 기장 고리원전 등의 순서로 도래하지만 발의된 법이 1년 가까이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폐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용후 핵연료를 둘 곳이 없어 원전을 멈춰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1대 국회 임기가 막판으로 치닫는 가운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원 구성과 법안 발의에 시간이 지체되며 신규 원전 건설과 원전 계속 운전에 기대를 거는 국내 원전 생태계에도 중·장기적으로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이진영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비슷한 결론…여야 3건 발의

이날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에 관한 특별법은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21년 9월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데 이어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인 지난해 8월 국민의힘 소속 김영식 의원과 이인선 의원이 각각 제안한 법안 등 총 3건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강문자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장은 “여야와 지역 주민, 전문가 모두 법 통과가 시급하다는 데에는 의견이 같고 제안된 법안도 큰 틀에서는 같다”며 “이견은 협상을 통해 충분히 조율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고준위 방폐장 문제는 이른바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는 비유가 나올 정도로 우리 원전 생태계의 취약 요소로 꼽힌다. 원전을 가동하면 필연적으로 사용후 핵연료가 나올 수밖에 없지만 우리나라는 1978년 고리 1호기 상업운전부터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시간만 끌어왔다. 포화 시점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박근혜 정부에서야 2013년 10월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의견 수렴에 나서 2016년 7월 2051년까지 영구처분장을 완공하는 기본계획을 확정했다. 이후 법안 제정이 추진됐지만, 문재인 정부는 전 정부의 공론화 당시 주민 의견 수렴이 부족했다는 이유로 이른바 ‘재검토위원회’를 운영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21년 4월 권고안을 내놓고 퇴임을 앞둔 그 해 12월 2차 기본계획을 마련했지만, 임기 내내 허송세월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박근혜 정부의 결론과 차이는 없었다.

정재학 경희대 교수는 “방폐물을 발생시킨 세대가 장기관리 방안을 마련해 미래 세대에 부당한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게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최상위 기본안전원칙”이라며 “원전의 혜택은 우리 세대가 누리고 사용후 핵연료 관리 부담을 미래 세대에 전가하고 있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미래 세대에 부담 넘기지 말아야”

이날 토론회에서 정재학 교수는 “지금 발의된 특별법은 짧게 따져도 10년 동안 진보와 보수 정부에서 진행한 두 차례의 공론화와 국회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법안”이라며 “특별법 제정을 또 미루면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놓게 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EU(유럽연합)가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에서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로 분류하며 사용후 핵연료 처리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상황에서 반대 명분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는 “영국의 시민단체가 추진하는 RE100(Renewable Electricity 100%)은 글로벌 트렌드이니 지켜야 한다면서 EU 차원에서 강조하는 방폐장 건설의 필요성은 도외시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세계 각국이 탄소 중립의 주요 수단으로 원전을 선택하고, 원전 확대를 추진하는 가운데 계속운전을 막을 논리는 약하다는 것이다. 법이 통과되면 향후 원전 수출 과정에서 건설부터 고준위 방폐물 처분까지 결합해 진출하는 방안도 검토된다. 정동욱 교수는 “방폐장은 원전을 가동하는 우리나라에서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더는 특별법 통과를 늦출 수 없다”고 말했다.